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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의 쓸쓸한 날 만화 읽기] 싸움의 기술

-최규석의 만화 『송곳』(창비, 2017)


문종필(문학평론가)



드라큘라의 고백


   K형 추운 겨울 잘 지내시오. 외롭진 않소. 고독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수면제를 먹진 않소. 식사는 잘 챙겨 드시는 거요. 예전에 K형이 말했던 것이 생각나오. 우리 같은 사람은 아프면 안 된다고 말이오. K형과 나,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소.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오. 얼굴은 보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안부를 적어보는 것이 얼굴을 보는 것보다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오. 우리에겐 우정이 있지 않소. 그때 그 시간만이 할 수 있는 부딪침 같은 거 말이오. 이 시간이 반복되진 않겠지만, 그때의 기억이 이렇게 편지를 쓰게 하는지 모르오.


   며칠 전 네 편의 영화 <Maze Runner: The Death Cure>, <Downsizing>, <1987>, <Wonder Wheel>을 봤소. <Wonder Wheel>을 제외하고,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소.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생활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믹키의 생일 선물을 챙기는 지나의 발버둥이오. 믹키는 지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 말이오. 쓸쓸한 이 장면을 떠올리며 어두운 극장을 빠져나왔소. <Maze Runner>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아이들을 실험한 것이 허사였음을 보여준 영화였고, <Downsizing>은 유토피아 없음을 돌려서 이야기한 영화인 것 같았소. 살기 위해 지옥으로 향해야 한다는 포스터와 유머러스한 장면은, 영화가 재미없었음에도 여전히 마음 한편에 머물러 있소. 영화에 대한 숨겨진 장점을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소.


   기대하며 본 것은 <1987>이오.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소. 팝콘을 부스럭거리며 먹는 누군가의 기척에 불편해했소. 이런 영화를 보는데 팝콘을 먹다니,라고 얼굴을 찡그렸소. 생각해보니 내가 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소. 팝콘을 먹든 먹지 않든 간에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느낄 수 있는데 말이오. 나야말로 속물인지 모르오. 내 가슴에 있는 추악한 감정부터 다스려야 할 것 같소.


  영화를 보고 흘렸던 눈물이 가짜 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몽상을 했소. <1987>을 보며 당신 세대가 아닌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 강한 압박을 받았소. K형 내가 왜 이 영화를 보고 온전히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압박’을 받았다는 표현을 썼는지 모르겠소. H 시인은 페이스북에서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적었던 기억이 나는데, 내 눈물은 진짜가 아닌 가짜 눈물인 것 같소.


   K형 보고 싶소. 나는 드라큘라처럼 살고 있소. 늙지 않소.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고 살고 있소. 그래서 늙지 않는지 모르오. 두 달 전 회식자리에서 누군가가 내 얼굴을 보며 깨끗하다는 표현을 사용했소. 생각해 보니 내가 늙지 않는 것이 이 발언에서도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늙지 않는 것은 아니오. 머리카락이 천천히 빠지는 것을 보니 영원히 늙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늙어가고 있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한 것 같소. 따지고 보면 드라큘라만도 못한 인생을 살고 있소.  


   중요한 것은 드라큘라처럼 일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이렇게 늙지 않는다는 거요. 불쌍하지 않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 인생이 안타깝지 않소. 누군가는 편한 생활이라고 하지만, 이 생활은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소. 나에겐 자유가 없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문 행위뿐이오. 이런 나를 K형은 어떻게 생각하오.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고, 돈을 벌고 싶어도 돈을 벌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이란 말이오.



드라큘라의 몽상
 
   K형 생각해보면 세상에 쏟아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가 서 있는 ‘곳’과 섞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 같소. 바라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이곳’과 ‘저곳’을 오염시키고 있소. 최근 흥미로운 책을 읽었소. 서구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이야기를 하는 『을의 민주주의』가 그것이오. K형 이 책 읽어 보셨소?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다는 점이오. 이 책은 ‘갑’이 아닌 ‘을’ 개념을 통해 타자가 아닌 타자의 타자를 포괄하고 있소. 그래서 ‘을’ 개념이 '단편'의 형식에서 '장편'으로 이어지길 속으로 응원했소. 이 응원 속에는 질투도 섞여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오.


   우리 시대의 싸움에 대해 생각하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해 보고 있소. 이 책의 저자처럼 특정한 개념을 만들어 사회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소. 이 싸움은 냉정하면서도 열정적인 것이오. 하지만 이 방식을 감행하기 위해선 시간과 돈이 필요하오. 앞에서도 말했듯이, 드라큘라는 이 작업을 감행하기 힘드오. 그 이유는 K형도 알고 있는 것처럼 드라큘라는  피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래서 빛을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오. 그러던 어느 날 빈둥빈둥 집에서 벼룩처럼 지내다가 우연히 『송곳』을 읽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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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곳』을 읽으며 수영장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숨을 곳이 없소. 같이 수영하는 LG 서비스센터 Y가 드라마로도 반영한 이 책을 지금에서야 보느냐고 통쾌하게 비웃는 것이 아니오. 그래서 최근에서야 완간되었기 때문에 지금 읽게 되었다고 무식한 뒷모습을 숨기기에 바빴소. 며칠 후, 그의 노조 투쟁 이야기를 『송곳』보다 더 라이브 하게 듣게 되었소. 그는 자신의 몫을 지킬 줄 아는 어른이오. 나처럼 늙을 수 없는 불운한 운명을 가진 드라큘라가 아니오.


   드라큘라는 싸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그래서 직접 싸우지는 못하고, 이렇게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의자에 앉아 내 싸움이 아닌 누군가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오. 김수영 선배가 말했듯이 이런 글쓰기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소. 싸우는 현장에서 물러나 피 흘리며 살 수밖에 없는 드라큘라의 모습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지 않는다면, 내 싸움이 아닌 누군가의 싸움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오. 한계란 말이오. 아무리 노력해도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한계란 말이오. 드라큘라의 일상을 자책하며 이렇게 몽상을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오. <Downsizing>의 주인공처럼 무엇이 되었든 용기를 내야 한단 말이오. K형 내 자신이 부끄럽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삶이 부끄럽소. 그래서 『송곳』을 통해 싸움의 기술을 배워 보려고 하오. 이 기술은 누군가에게 알리고자 함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에게 하소연하는 발버둥이오. 
 


묵직한 ‘카운터 펀치’는 아니지만 날카로운 ‘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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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거… 뭐 사례금이야? 친구 몇 살? 스물넷인데요. 이야…그 나이 먹고 제 몸 판 돈도 떼이고 그랬구나. 어이, 친구야. 쓸데없는 어른 흉내 내지 말고…니 밥그릇이나 잘 챙겨, 어?”(1권: 21)


   K형 앞으로 독해집시다. 밥그릇도 챙기지 못하면서, 위인처럼 어설프게 마르크스를 논하거나 마르크스의 후배들을 이야기하지 맙시다. 지금 당장 굶고 있는데,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어른 흉내 내지 맙시다. 고상하게 기다리거나 눈치 보지 맙시다. 우리가 언제까지 드라큘라처럼 살아야 합니까. 내 밥그릇을 뺏기지 말고 챙깁시다. 밥그릇 뺏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살아냅시다. “사람 모가지가 얼마나 질긴지 보여”(2권: 54) 줍시다. “싸움은 경계를 확인”(2권: 92-93)하는 것입니다. 첫발을 내딛지 않고는 상대가 어떤 몸짓을 할지 모릅니다. “뺏어도 화내지 않고 때려도 반격하지 않으니까”(2권: 180)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보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2권: 181) 나옵니다. 우선 부딪쳐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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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부터 같이 먹어요.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1권: 213)


  K형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싸우기 위해선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오. 함께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오.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은 우직한 행위이지만, 계획적으로 움직인다면 빠른 속도로 바위를 부술 수 있소. 그래서 연대해야 하오.


   하지만 이 연대가 쉽지 않소. 같이 뜻을 함께한다는 것은 멋진 말일 수 있겠으나, 행위로 옮기는 것은 만만치 않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오. 두껍고 멋진 이론으로 ‘내’가 아닌 ‘당신’을 설득해야 하오? 하지만 이런 방식처럼 폭력적인 것은 통하지 않소. 술자리에서 많이 경험해 보지 않았소. 꼰대들의 ‘아는 척’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다는 것을 말이오.


   K형 그러니 좋은 사람부터 됩시다. 우리 이제부터 아는 척하지 말고, ‘내’가 아닌 ‘당신’과 밥부터 먹어봅시다. 생각해 보니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도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연대의 필요성만을 역설했음을 부정할 수 없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일부러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K형 우리 밥부터 먹자고요. 사랑하는 P야 우리 우선 밥부터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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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하세요. 당신이 지키는 건 황준철이 아니라 인간이오. 착하고 순수한 인간 말고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 선한 약자를 약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2권: 62-63)


   K형 인간에 대한 희망을 꿈꾸오. 인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시오.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인간에 대한 희망은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같소. 인간의 몸속에 꿈틀되는 무수히 많은 감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것 같소. K형 그러니 인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인간에 대한 낭만성은 어린 시절 꿈꾸었던 판타지임을 인정합시다. 아무것도 몰랐었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 만들어낸 환상임을 인정합시다. 있지도 않은 희망의 주변을 돌아다니기보다는 이곳이 폐허임을 냉정히 깨닫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인간’을 위해서 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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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합원들한테 실망했어요? 노조 하면 원래 회사랑 싸우는 것보다 조합원들끼리 싸우는 게 더 힘든 거요. 실망할 거 없어요.”(3권: 200)


   K형 너무 실망하지 마오. 싸움이란 것이 그런 것이오. 적이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밖에 있는 적보다 ‘안’에 있는 적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든 법이오. ‘안’으로 더 밀고 들어가다 보면 내 ‘자신’과 싸우는 싸움이 어쩌면 가장 버거운 것인지도 모르오. 그러니 K형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소. 도망치지 마시오. “도망치면 내가 틀린 게 되니까…아니…걔들이 옳은  게 돼버리니까”(5권: 110) 말이오. 싸우는 과정에서 큰 기대를 걸지 맙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걸고 싸워봅시다. 과정이 결과가 되는 신비한 마법을 경험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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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소 앞에 이렇게 나래비를 주욱 서 있단 말이죠. 그죠? 마려워 죽을 거 같은데 희한하게 옆 줄만 짧아져. 나보다 늦게 온 인간이 나보다 먼저 싼다고. 억울하죠? 이거 해결하려면 어째야겠어요? 한줄 서기! 한줄 서기 하면 억울하진 않겠죠? 그런데 그런다고 마려운 게 해결돼? 결국 필요한 만큼 변소를 더 지어야 된다고. 그런데 잘난 사람들 텔레비전 나와서 맨날 하는 소리가 뭐요?”(4권: 15)


   “어느 줄이 빨리 줄어들지 알 수 있는 비법을 알려드리죠. 내가 싸고 봐야 세상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싸고 있는 그 사람도 조금 전까지 당신만큼 마렵던 사람입니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 책임으로 덤터기를 씌우는 거죠? 개인적으로 해결해봐야 싸는 순서만 바뀌지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안 바뀐다고!”(4권: 16)


  K형 우리가 바꿔야 하는 것은 시스템이오. 이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서는 제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소. 누군가는 특정한 시스템에 안착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쏟아 붓겠지만, 이 쏟아 붓는 행위는 특정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소수 몇 명에게 한정되어 있음을 잊으면 안 되오. 경쟁 자체가 불공평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러니 우리는 특정한 시스템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시스템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오. 그래서 혁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혁명 ‘이후’가 우리에게 더 값진 것인지 모르오. 혁명 이후, 새로운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비극은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소. 그러니 몸이 부서져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온 힘을 쏟지 않으면 안 되오. 길이 없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가지 않으면 안 되오. 길이 없을지라도 새로운 길이 있음을 부르짖을 때, 기적 같은 새로운 사건과 만날 수 있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름”(6권: 211)을 찾을 수 있소. 이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오. 이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평등하지 못한 세상에 평등이 걸어올 수 있고, 지독한 편견을 조금은 뒤로 물러설 수 있게 할 수 있소.


   K형 바꿔 봅시다. 어떻게 해서든지 바꿔 봅시다.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 노력이 조금이라도 가치 있음을 보여줍시다. “뭐가 좋은지를 보여”(2권: 211) 주어서 다음 세대에게 싸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 증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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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K형 그만 자리를 떠나야 할 것 같소. 『송곳』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오. 선과 악의 구도로만 읽히지 않소. 악도 악 나름의 포기할 수 없는 진정성이 녹아져 있는 것 같소.   


※ 이 글에서 인용한 책은 만화가 최규석의 『송곳1-6』이다. 인용 시에는 괄호 안에 권 호와 인용한 페이지를 적는다.




 

 

작성일 : 2018.02.06
저자 소개  

문종필
문학평론가.
1980년생. 웹진 <문화 다> 책임 편집동인. 2017년 <시작> 문학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ansanssunf@naver.com
[댓글]
 
klkl  [2018-05-14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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