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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훈의 문화시론] 미안하다 말하기가 어렵다

오영훈(문화칼럼니스트)


 

   “나도!” 하고 손을 번쩍 든다는 게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 거다. 미투(MeToo) 얘기다.


   대학시절에 비슷한 일을 겪었다. 엠티를 갔다가 한 여학생이 자는 중에 성추행을 당한 것. 학교로 돌아온 뒤 여학생은 학생회에 보고해 처리를 바랐다. 가해자 남학생은 잠적해버리고는 학생회 측으로부터의 어떤 질의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당시 학생회 간부였던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성폭행에는 ‘피해자중심주의’가 적용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벌어진 일은 여학생이 묘사한 그대로인 것 같다고 학생회 임원들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잠잠 무소식 남학생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처벌을 해야 하나? 머뭇거리던 나는 ‘학생회는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발언했고, 여학생을 대변해주던 그의 남자친구이자 학생회 간부였던 후배는 대갈일성, 자리를 박차고 회의장을 나갔다. 오래된 일이지만 잊을 수가 없다.



미투의 화살은 남성이 아닌 전체 권력구조에


   미투 운동이 한국사회에 던진 화두를 ‘구조,’ ‘인격,’ ‘사람’ 세 가지로 꼽아봤다.


   옛적에 마을에 도둑이 끊이지 않으면 풍수꾼을 불러 땅을 보고 서낭당을 쌓거나 마을 어귀에 나무를 심는 등 기의 흐름을 손봤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은 문제라도 자꾸 겹치면 문화라든가 집단구조에 원인이 있지 않는지 둘러보는 게 고금에 통용되는 이치다. 현 정부에서 한창인 적폐청산이 정치권력 범죄자 때려잡기가 아니라 그런 이들을 양산한 사회구조의 개혁에 있듯, 미투 운동의 시대사적 함의가 성역할로 두드러지는 왜곡된 권력의식의 정화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즉 미투 운동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폭로 프레임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그를 벗어나는 메시지를 띄기 때문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다.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작가 톰 리스는 ‘미투는 전 지구적 여성 저항 운동이지만 싸워야 할 대상은 남성이 아닌 전체 권력구조‘라 했다.


   단 모든 권력구조가 타파해야 할 대상인 것은 아니다. 푸코의 권력론이 가르쳐 주는 게 있다면 모든 생각과 언설 하나하나가 역사적 권력관계의 소실이자 권력의 원천이라는 관찰이다. 권력은 편중되기 마련이다. 다만 다양성과 탄성을 양 날개로 삼고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권력의 편중이어야 한다. 예컨대 사회적 소수자, 즉 싱글맘·장애인·비정규적·저소득층·저학력자·피부색 짙은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문제이지 이들이 소수자인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소수자와 다수자를 잇는 방식이 윤리이며, 윤리란 동시대를 사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게끔 함께 만들어 갈 때에만 모순 없이 우리 삶 전반을 포괄하는 살아있는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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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은 남성의 본성인가


   그런데도 강간은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남성의 본능에 속한다는 따위의 궤변을 늘어놓는 이가 아직도 있다. 풍수꾼에게라도 가르침을 받을 일이다. 성욕과 성폭력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전자가 생물학적이라면 후자는 구조적이다. 과거 성폭력이 조직적·합법적으로 존재했던 때가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역사의 준엄한 판결을 받았다. 2014년 나이지리아 이슬람 극단주의세력 보코하람에 의한 여학생 274명 집단나치 사건은 현재진행형의 충격적인 사례다. 끌려간 여학생 대부분은 조직원들과 강제로 결혼해 아이를 낳거나 여전히 성노예로 고통 받고 있다.


   조직적 범죄를 넘어 국가권력이 성폭력을 통치수단으로 동원한 사례도 많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백인 여성을 강간한 흑인 남성은 사형이나 거세 등 극형에 처해졌다. 반면 흑인 여성에 대한 강간은 불법이 아니었다.


   합법적 성폭력은 식민시기 권력의 전시효과도 있었다. 미국에서 19세기 말까지 아메리카 인디언 여성에 대해 묵과된 강간이나, 일제가 조선, 중국,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등 식민지 여성을 대상으로 전횡한 일본군 성노예(위안부)가 이에 속한다.


   조직적으로 허용된 성폭력의 과거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골 깊은 갈등은 후대가 치유해야 할 몫으로 떠안는다. 반성·화해·용서 없이는 오해·증오·충돌뿐이라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한다.


   1975년 미국에서 「강간문화(rape culture)」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강간, 근친상간, 가정폭력 등의 범죄가 은밀하게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벌겋게 드러내는 계기였다. 강간이 성의 범죄라기보다는 폭력 범죄요, 성욕의 발현이라기보다는 남성지배와 성별규준의 문제라는 의식이 그렇게 서구에서부터 차츰 자라났다. 미투 운동은 범세계적 현상이지만 교육효과로 볼 때 한국판 「강간문화」라고도 하겠다.



펜스는 겁쟁이


   또한 미투 운동은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인격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왜곡된 성의식을 스스로 돌아보라는 요청이다. ‘아내 이외 여자와는 단 둘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한 미국 부통령에게서 비롯된 ‘펜스 룰’은 비정상적인 성의식 앞에 모른 척 돌아설 겁쟁이의 규칙에 다름 아니다. 부정의한 관계로부터 태동된 일탈이나 범죄를 남성(혹은 여성)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한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이렇게 본래 자기기만의 풀뿌리운동이었다. ‘단 둘이 식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나의 인격마저 잠식해버린 왜곡된 성의식을 돌아볼 줄 아는 도전정신을 가지라는 얘기다.


   미국 페미니스트 연구자 레베카 솔닛의 ‘특권무지’(privilious = privilege + oblivious), 즉 ‘자신이 행사하는 특권이 타인에게 어떤 고통을 가하는지 전혀 모르는 현상’은 미투 운동이 제기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지적이다. 친한파 프랑스 석학 기 소르망도 “한국 남성은 자신들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왜? 중앙일보 이하경 주필이 시원하게 칼럼(2018년 3월 12일)을 썼다. 경쟁과 성공이 최고의 가치로 버티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선 대한민국에서는 1%가 되지 못 한 대다수는 ‘죄가 없어도 고개 숙여야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단다. ‘내 마음과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미투를 외치자고 독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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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미투


   그런데 이 주필은 코미디처럼 썩어가는 대한민국병의 가장 큰 원인으로 “좁은 땅덩어리에서 형제에게 총부리를 들이댔던 후유증과 독소[가] 고스란히 오장육부에 DNA로 박혔다.”며 다시금 분단체제론을 들고 왔다. 분단체제론의 복음서 『창작과 비평』은 2018년 봄 호 제목도 ‘분단체제를 다시 생각할 때’란다.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 구석구석까지 한국전쟁의 독소가 암세포로 퍼져가고 있다는 내용이 골자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 속에 ‘적폐’와 그를 키워온 구조를 청산하는 것이 87년 세대와 현 정부의 기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핵이 폐기되고 휴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어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면 이제 우리들 마음에도 ‘평화’가 들어설까? 오늘날 혐오 증후군을 비롯해 온갖 코미디 시리즈의 원인이 과연 맹목적 반공주의로 귀결된다면, 그런 반공주의는 어디에서 왔나. 당장 적대와 편견의 총부리가 이제 작심하고 일본으로 향하진 않을까. 내가 보기엔 분단체제론과 적폐청산에는 가장 중요한 ‘사람’―‘우리’만이 아닌 ‘모두’―에 대한 가치모색이 빠져있다. ‘평화체제’는 ‘평화’와 동의어가 아니다. 주객이 전도됐다. 풀뿌리로 꼬아놓은 ‘정상화’는 풀뿌리가 풀어야 한다. 미투가 세 번째로 호소하는 것은 이 부분이다.



마음의 교류 위한 미투


   복수, 청산, 개혁 따위보다도 미투 참여자가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은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다. 최근 저명한 연극연출가가 관련 사회적 물의로 지탄을 받은 끝에 연 기자회견에서 말하길, ‘만약 (상대방 여배우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생각을 했다면’ 사과한다고 했다. 이게 더 큰 화를 부른 건 불을 보듯 뻔했다. 한성열 심리학 교수는 이런 게 바로 ‘변명’이라며 ‘진정한 사과는 마음의 교류’라고 했다. 상호간의 인정이다. 함석헌 선생의 말마따나 ‘모든 싸움은 사랑싸움’이리라.


   처음부터 ‘사과의 달인’인 이는 아무도 없다. 용기와 노력으로 학습되는 것이다. 그런 용기에 대해 들어본 이 얼마나 있는가. 그런 학습을 받아본 이는 있는가. 미투 운동 이전까지 나 역시 문외한이었다.


   서두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피해를 입은 여학생이 당연히 우선이지만 이제 ‘가해자’가 되어버린 이에게도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애써 외면하려는 그는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까. 그리 큰 잘못은 아닐 거라고, 아니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다고 지워버리려 애쓸까. 그를 생각하노라니 잊은 줄 알았던 지나간 허다한 과오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나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미안하다’ 말하기가 아직 너무 두렵다.


   왜곡된 성의식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 속 권력남용이 단단한 전통으로 굳은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사과를 바라는 미투에 2차 피해를, 여기에 또 공격을, 또 공격을 반복하며 실수와 복수의 수레바퀴는 점점 빠른 속도로 돈다. 과연 누가 먼저 굴레를 깨고 나와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속 시커먼 저 파렴치한이 바로 나의 분신임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 말고 미투가 진정한 학습이 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아직 찾지 못하겠다.



모두가 피해자, 모두가 가해자


   미투 운동은 시퍼런 양날의 비수다. 성폭력이 버젓이 우리 사이에 들어와 있음을 살점을 도려내듯 만천하에 폭로한다. 인면수심 폭력의 불씨가 성별을 불문하고 우리 모두의 일상의 삶과 마음들 사이사이에 왕왕 살아 있다는 빨간불이다.


   다른 한 편으로 미투 운동은 조선 시대 이래 수백 년을 살아 온 강간문화로부터 어서 뛰쳐나오라고 재촉한다. 성폭력이 정당화되고 심지어는 남성의 특혜로까지 받아들여져 왔음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다그친다. 불쾌한 응답들을 곳곳에서 마주친다. 경찰 등 공권력의 방조, 피해자에 대한 비난, 가부장제 규준에의 고수, 낙인찍히는 것에 대한 피해자 및 가족들이 갖는 두려움 등등이 지속되며 강간문화를 유지한다.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는 참교육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미투 운동은 비수다. 비수의 손잡이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조심스럽게 쥐고 정확히 사용해야 한다. 잘못 사용하면 크게 다친다. 벌써 여럿 다쳤고 목숨까지 잃었다. 미투의 비수가 도려내야 하는 병폐가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언젠가 병이 낫고 새 살이 돋기를 바랄 뿐이다.




작성일 : 2018.03.23
저자 소개  

오영훈
1978년생. 문화 칼럼니스트. 《문화 다》편집동인. 《산악연감》 편집위원.
인류학 박사. 네팔 셰르파족을 연구하기 위해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랐음. 월간 <산>, 월간 <마운틴> 등에 기고. 7mmr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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