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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혁의 아방가르드 주점] 문학에서 소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단상

   

이성혁(문학평론가)

 

 

근래 문학계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담론이 무성하다. 이에 대한 나의 단상을 정리해서 발표해보고자 한다. 곧장 이야기하자. 문학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문학작품에서 정치적 올바름으로부터 벗어난 표현이라든지 시구를 (표피적으로) 찾아내고 이를 검열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면, 그러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 문학작품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읽기 위해서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이면적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이는 비평 작업이 해야 할 것이다.(비평가가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독자의 비평작업을 의미한다)

 

문학작품에서 어떤 단어가 노동자를 비하한다고 하더라도, 그 단어가 쓰인 맥락 속에서 그 단어를 읽어야 하며, 그리하여 그 단어가 가져오는 효과가 어떤 것인지 보아야 한다. 작품이 결국 전달하고 있는 것이 노동자를 비하하기 위해서인지, 또는 노동자를 비하하는 사회의 단면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인지 가려 읽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을 누가 판단할 수 있는지, 과연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내세워진 어떤 내용이 올바른 것인지, 그 올바름이라는 것이 기성 사회가 제시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페미니스트 양효실은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에 실린 이 여자들을 보라에서, 비르지니 데팡트의 나쁜 페미니즘을 소개하면서 좋은 페미니즘이 전제하는 성에 대한 도덕과 엄숙함, 경건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강간의 피해자 서사”(99)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반복과 확장을 가져올 수 있음을 지적한다. 양효실이 다른 글에서 정치적 올바른 언어라는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것, 대신에 여성의 문제를 좀더 복잡하고 난해한 방식으로 다시 쓰는 것, 그래서 여성의 문제는 여성에게서 잘라낼 혐오스런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내고 계속 갈등하면서 협상해야 할 자기 성찰의 문제임을 받아들이는 것”(예술의 자율성과 여성주의, 문학동네2017년 겨울호, 407)을 주장하는 것은 그 지적과 관련된다. 그리고 그 갈등과 협상, 자기 성찰을 심도 깊게 진행케 할 수 있는 글쓰기가 바로 문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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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글쓰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심보선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동의한다.

 

시란 사회적으로 주어진 규칙과 규범의 코드를 재편하고 재구성하는 급진적 코드 작성 및 실행이다. 이때 정치적 올바름이 또다른 윤리적 코드가 되어 시를 규제하고 통제한다면 그 또한 검열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일전에 말한 겁니다. (중략)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윤리적 코드에 따라 우리는 여공이라는 말을 여성 노동자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는 여공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면서도 그것에 연결된 말의 배치를 바꾸고 그것에 함축된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전도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공이라는 말이 담는 억압적 편견을 거부하고 그 말에 새로운 의미와 쓸모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시는 여공을 단수의 피지배자에서 복수의 주체로 전환시킵니다. 하지만 시가 자동적으로 이러한 전환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심보선하재연, 침묵조차 수많은 말로 바꾸는, 심보선 시의 구부러지는 부호들에 관한 대화, 문학동네2017년 겨울호, 30-31.)

 

위의 발언 중에서 앞부분의 발언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는다. 그 발언이 자칫 윤리의 문제를 시에서 삭제할 수도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위의 진술 이후 몇 페이지 다음에 시인 자신이 좋은 해명을 하고 있기에, 대담을 읽어보라고 권하면서 따로 문제 삼아 논의하지 않겠다. 아무튼 정치적 올바름이 하나의 윤리적 코드가 되어 규제와 통제를 가져올 위험성에 대한 지적에는 동의하며, 혐오가 담긴 단어라고 하더라도 시에서 그 말에 새로운 의미와 쓸모를 부여할 수도 있다는 생각 역시 같은 생각이다. 시가 창출하는 사건을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교조적으로 사용하여 시의 뒷덜미를 붙잡는다면 시는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러한 식의 정치적 올바름은 시 창작을 넘어 자유와 해방의 정치의 뒷덜미를 붙잡게 될 것이다. 이때의 정치적 올바름을 정말 정치적으로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를 도덕적 중압으로 짓누를 교조적인 정치적 올바름은 해방의 정치가 아니라 또 다른 구속의 정치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 제기되는 맥락을 비웃으면 안 된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비판한다면서 문학이 정치적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짓누르는 것 또한 교조적 정치적 올바름의 거울상과 같을 것이다. 가령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적인 개념으로 프레임화 하고, 이 프레임을 작품에 덮어씌우면서 미학과 정치를 분리하여 작품이나 비평을 판단할 경우가 그렇다. 정치적 내용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담으려고 하거나 작품을 통한 정치적 참여를 감행하고자 하는 작가, 그리고 이러한 활동에 비평 논리를 세워 뒷받침하고자 하는 비평가에게, 당신의 작품이나 비평은 평면적일 수밖에 없으며 정치적 올바름을 다른 작가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면 문제다.

 

정치적 올바름이 문학계를 짓누르고 있다는 판단 역시 과도한 판단이며 정치적 올바름의 프레임을 새로이 나아가려는 문학에 덧씌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학을 통해 삶을 바꾸고자 하는 기획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제기되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 정치적 올바름(correctness)무엇이 올바른 정치, 그리고 좋은(good) 정치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하고, 이 질문 속으로 근본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이 제기하고 있는 도덕의 정치에서 욕망의 정치, 해방의 정치로 우리의 정치가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 욕망과 해방 과정에 문학이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지 문인들이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문학은 삶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더 북돋을 수 있는 것인지, 삶을 파괴하는 권력이 작동하는 현장과 방식을 드러내면서 어떻게 그 권력에 저항할 것인지, 그리고 해방들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어떻게 해방들을 창안하고 발명할 수 있는지 탐구하고 실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작업이 해방을 위한 정치 활동과 교차하면서 평행하게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문학적-미학적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문학의 정치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과 정치는 서로 번역되면서 함께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모델에 문학이 맞추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권력에 저항하며 더 나은 삶을 만들어내기 위한 다중의 투쟁과 같이하면서 해방의 정치를 창출해나가는 작업이다. 이렇게 볼 때 문학이 지닌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은 더욱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시를 여는 세상> 2018년 봄호 실린 필자의 글 최근 한국문학계의 난경에 대해 생각한다4절을 수정한 글입니다.

 

 

 

작성일 : 2018.05.14
저자 소개  

이성혁
1967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문화 다》 편집주간.
1999년 《문학과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2003년 《대한매일신문》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으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 redland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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