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본 기사[종합]
별점 평가
★★★★★★★☆☆☆
★★★★★★★★☆☆
★★★★★★★★★★
★★★★★★★★☆☆
★★★★★★★★★☆
★★★★★★★★☆☆
★★★★★★★★☆☆
위치 : HOME > 통합 > 연속 기사
[일곱째별의 다큐 이야기] 광장의 열흘, 그리고 또 하루(2)

일곱째별(르포작가)



  <2016년 12월 10일 토 제7차 범국민행동집회(서울 80만 명 전국 104만 명)> 포스트에는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옷을 입은 트럭 양 옆으로 시민들의 대열이 줄 서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걷는 시민들은 하나같이 젊고 패기가 넘쳐 보였다. 청와대 100미터 앞에는 ‘현대차가 지시한 노조파괴로 유성기업 노동자 한광호가 죽었습니다’라는 피켓이 세워져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세월호 7시간 단 한명도 안 구한 박근혜 구속수사!’라는 글귀에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 1학년 때 단체사진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서 있었다. 거리에는 박근혜 사진을 넣은 철창과 경찰 차벽에 붙은 철창에 갇혀있는 박근혜 스티커가 등장했다. 사드 도입 한반도 평화위협 박근혜 즉각 퇴진, 개성공단 폐쇄 남북관계 파탄 박근혜 즉각 퇴진, 모든 구호는 기, 승, 전, 박근혜 즉각 퇴진이었다. 파란 고래가 시민 행렬 위로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날아라, 날아올라라, 고래야. 나는 사진 속 고래에게 마음으로 외쳤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18일이 되어도, 19일이 되어도 12월 17일 제8차 범국민 행동집회가 포스팅 되지 않는 거였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8차 촛불집회를 주최한 ‘박근혜 정권퇴진 비상 국민행동’(퇴진행동)은 “전국에서 약 77만750명의 시민들이 박 대통령의 퇴진과 탄핵심판, 황교안 아웃, 박근혜 정부의 정책 폐기 등을 외쳤다”고 밝혔다. 지역별로는 서울 65만 명, 부산 5만 명, 광주 3만 명, 대전 1만 명, 울산 7천 명, 대구 5천 명 등이 모였다. 그런데 내가 즐겨 찾는 그 블로그에는 며칠 째 새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나의 블로거가 아픈 건 아닌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쓸데없는 염려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제9차 촛불집회 이틀 전에 그녀는 전에 없던 영화 감상문을 올렸다. 4년 전, 경찰과 용역 직원의 폭압적인 진압으로 인해 점거 농성 중이던 두 명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원 두 명과 경찰 한 명, 도합 다섯 명의 사망자를 낸, 용산 철거현장 남일당 화재사건을 영화화한 <두 개의 문>이었다.



두 개의 문movie_image6C4SROPJ.jpg


   2012년에 본 영화를 다시 보았다. 


   2009년 1월 20일 화요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추운 겨울이었다. 


   화요성경공부를 갔더니 전철연에 의한 화재로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말씀을 들었다. 


   탄식이 나왔다. 


   얼마 후, 혼자 남일당을 찾아갔다. 


   불탄 건물 뒤편엔 보헤미안 스타일의 카페가 차려있었다. 


   쑥스러운 발걸음으로 그 곳을 지나 조문을 하는 곳 멀찍이에 서 있었다.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큰 길에서 유족들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왔었다. 


   날이 추웠던 기억이 난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들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들이 빈민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 사건은 대한민국 국민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해가 바뀌고 대통령이 달라져도 정부는 여전히 엄동설한에 물대포를 쏘고 강경진압을 했다. 



DSC06955.JPG


   그러다 작년 11월엔 고故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셨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이 국민을 대하는 자세는 그렇게 폭압적으로 적나라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하고 두려운 정국이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났다. 


   얼마 후, 교회에선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했다. 


   교회를 계속 다녀야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2016년 12월.


   이제 얼마 있으면 남일당 참사 8주기를 맞는다. 


   그리고 봄이면 세월호 참사 3주기가 되겠지. 


   그 때까진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 


   3주기, 3주기까지는 달라져야 이 나라는 탈상을 할 자격이 비로소 있다.    


   2017년 1월 9일은 세월호 참사 1000일. 


   천 일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무얼 했나?


   과연 304명의 고인과 미수습자 앞에 조금이라도 미안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일 모레는 제9차 범국민집회. 


   이제 크리스마스이브는 더 이상 교회 행사를 하는 날이 아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생각해 본다면 캐럴은 진혼곡이어야 한다. 


   죽기 위해 태어난 어린 구세주.


   그의 짧은 인생을 생각해 본다면 크리스마스이브는 광장에서 보내는 게 마땅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 피 같은 십자가를 들고 선다면 죽음은 부활이 될 것이다.



DSC06703.JPG


   <2016년 12월 24일 토 제9차 범국민행동집회 (서울 60만, 전국 70만 명)> 포스트에는 광화문 정부청사 꼭대기에 장거리 빔으로 쏜 ‘박근혜 구속 조기 탄핵’ 아홉 글자가 보라색, 초록색, 노랑색으로 찍혀 있었다. 이 날 블로거는 광화문 광장에서 헌법재판소 앞으로 향했다. 아스팔트 차로위에 ‘감응’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것은 감응이란 글자 위에 그려진 파란 선 박스에 대기하면 자동으로 좌회전 신호가 들어오는 도로신호체계인데,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 곳에 불필요한 차량 대기시간을 감소시켜 주는 신호다. 불필요한 대기 시간을 감소시키면서 박근혜 탄핵과 구속을 조속히 끌어내 주었으면 하는 헌법 재판소 앞에서 세월호 유족들과 이재명 성남 시장의 모습이 큼지막하고 여유 있게 찍혀 있었고, ‘세월호를 인양하라’, ‘헌재는 탄핵 속결하라’는 등의 작은 현수막들이 시민들 손에 들려 있었다.  ‘즉각 퇴진 조기 탄핵’이 이날의 주된 구호였다. ‘온 누리에 하야를, 하야 크리스마스’가 몇 시간 후 조용히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는 나와는 상관없는 서양 명절 혹은 낭만에 대한 환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휴일에 불과했다. 다행히 일요일과 겹쳐 다른 해보다는 짧은 비감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탄핵안도 가결되고 거리에는 시민들이 한 마음으로 뭉치고 있었지만 나는 관행에 의한 원심력으로 인해 불안했다. 


   1960년 김주열 시신이 떠오르자 4·19 민주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했다. 그러나 곧 박정희가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한 후 기나긴 독재 18년이 이어졌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후에는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령 선포 및 사망자와 행방불명이 300여 명이었던 광주의 트라우마가 남았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사망으로 촉발된 1987년 6월 민주항쟁에는 ‘넥타이 부대’라 불리던 130만 명이 거리로 나왔지만 결과는 그 해 말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패배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다. 나는 반복되는 민주화 패배의 현대사가 이번에도 재현될까 좌불안석이었다. 나의 그러한 불안과 그녀의 불안이 비슷한 색채일까 묻고 싶었다. 그녀의 블로그에 방문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나의 일상은 매주 그녀의 블로그를 보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이 내게도 전염돼 오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녀를 돕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친구 신청을 하고 혹시라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그녀의 속마음을 엿보고 싶었다. 찾아가 그 고민을 들어주고 싶었다. 어느덧 나는 그녀가 매주 저 추운 광화문 밤거리에서 감기에라도 걸릴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인물-호연 엄마-일곱째별.JPG



   12월 29일, 평일 포스트에는 하얀 눈이 쌓인 검은 색 차의 보닛 위에 손가락으로 그린 사람 모형이 있었다.


   술도 맘껏 못 마시는 위태로운 밤길에
   가련한 나를 마중 나온 보닛 위 눈사람

   걸어가고 있구나
   움직이고 있구나
   점 세 개 찍어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걷는 게 달리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너는 이미 세상에 없는 걸
   사는 게 먹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너는 이미 내게 없는 걸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은 매일 펼쳐지고
   삼겹줄 목숨 끊지도 못하고 질긴 오늘
   수가성에 사는 나는 물을 길어 눈을 녹이러
   밤길을 걷는다 터벅터벅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달빛과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섞인 밤길을 그녀가 비척비척 걷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옅은 술기운이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를 부축해 주고 싶었다. 전체 공개를 한 지 얼마 안 된 그녀가 이렇게 불특정다수를 향해 SOS를 보낼 땐 누구라도 다가와 도와달라는 신호 아닌가라고 추측해 보았다. 나는 내 추측이 정당하길 바랐다. 서울 시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녀를 찾아내고 싶었다.  


   다음 날인 12월 30일에는 전에 없이 오전 중에 포스트가 작성되었다. 내 즐겨찾기에 새 글 신호가 뜬 걸 보자마자 얼른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다. 제목은 <마지막 산책>이었다. 마지막이라니? 올해의 마지막이란 말일까, 아니면 이생의 마지막이란 말일까, 나는 왼쪽 손톱을 물어뜯으며 마우스를 클릭해댔다.


   죽음으로 가는 길은 깊고 아늑하다
   동떨어진 빈 의자는 나를 비웃고
   날개 없는 추락은 호시탐탐 유혹하는데

   하늘이여
   산이여
   지척에서 우짖는 새들이여
   여기 눈감고 걸어가는 내가 있다

   아이 생일에서 한 달을 더 산 날
   가파른 길 오르면서 뇌까린다
   징징대지마. 죽지도 못할 거면서


   마침내 나는 그녀가 왜 심경의 변화를 가져와 속 얘기를 쓰는 지 알아냈다.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쓰던 11월 30일은 아이 생일이었을 것이다. 그 날의 포스트는 한 가지 정보를 더 주었다. 나는 심히 위태로운 그녀의 동선을 알아냈다. 그 포스트에 나온 사진 세 장으로 그녀를 찾아 나설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그곳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우연을 가장하고라도 그녀와 조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다음 날은 2016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그녀가 그 날을 어떻게 보낼지 몹시 궁금했다. 


   <2016년 12월 31일 토 제10차 범국민행동집회(서울 100만여 명 전국 110만 명)> 


   그녀는 2016년의 마지막 날, 세월호 심야식당에 있었다. 그리고 밥 120g, 카레 150g, 순무김치 11g, 그릇 10g까지 총 중량 291g을 맞춘 카레 컵 밥을 만들어 4160명의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는 노란 옷을 입고 있을 그녀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산책의 종착지였던,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 분향소가 있는 안산 화랑 유원지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 찾기를 포기했다. 찾아가 무슨 말을 한들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배우고 알아낸 어떤 언어로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열 번의 광화문 집회로 2016 병신년이 지나갔다. 그리고 끝자리 숫자 하나가 더해진 새해가 시작되었고, 여전히 주말 집회는 계속되었다. 2017년 첫 토요일이었다. 그날 밤, 한 시간 반을 남겨두고 광화문 앞 작은 섬과 같은 소나무 밭에서는 불꽃이 한 줄기 타올랐다. 그런데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언론이란 새떼는 사람 목숨 하나 사라진 것에 대해 지나치게 조용했다. 



2016DSC06282.JPG


   2017년 첫 주말이 지나, 나는 그녀의 블로그에서 아주 긴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정원 스님, 


   빨래를 널며 프레드릭 쇼팽의 피아노를 위한 콘첼토 E단조 No.1 Op. 11의 2악장 로망스(라르게토)를 듣는데 불현듯 스님 생각이 났습니다. 


   어젯밤 늦게까지도 저는 스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언제나처럼 11차 범국민행동집회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온 심야에 겨우 요기를 하려는데 분신 기사가 하나 났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자마자 서울대학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산동네 첩첩이 막힌 주차현실은 저를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새벽까지 올라오는 뉴스들을 검색하다가 세 시쯤 되어 포기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이 되어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는데 새벽 이후로 업그레이드 된 뉴스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무관심한 사회를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응급진료센터에는 스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화상치료 전문이라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돼 가셨나 했는데 바로 옆 중환자실에 계신다더군요. 로비에는 어젯밤부터 스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지 스님과 보혜 스님과 전 국회의원이 발언을 하셨습니다. 잠시 후 3층 중환자실로 올라가 스님 계신 방 옆 복도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저는 그 중 아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마를 주시는 남자분, 보약재를 주시는 여자분, 아무 것도 모르는 저에게 이것저것 친절하게 알려주는 기자분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들 남이었지만 전혀 남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스님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절이 편안하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스님도 한 분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고통 앞에 우리는 모였습니다.


   정원 스님,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우신가요? 의식이 없어도 우리 몸은 뇌가 살아있는 한 통증을 느끼죠. 화상으로 외상과 내상을 다 입으시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누워계신 그 육신의 고통이 어느 정도 끔찍할 지 전태일 열사는 알겠죠. 


   남기신 메모들을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이 나라가 그리도 중하셨습니까? 불의가 목숨을 버릴 정도로 견디기 힘드셨습니까? 


   스님, 저 역시 숱한 나날 죽음을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쇼팽의 피아노 콘첼토를 듣는데 왜 스님 생각이 이리 간절히 날까요? 이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있는 세상을 한번 더 살아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스님, 저는 살아야겠습니다. 스님이 버리신 이 세상을 살아야겠습니다. 스님이 이루려고 하신 세상과 제가 원하는 세상이 조금은 다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스님이 목숨까지 바쳐 이루려고 했던 나라가 지금보다는 나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촛불을 들고 매주 거리에 선다한들 뭐가 그리 순식간에 확실히 바뀌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천진난만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스님의 방법이 아닌 저의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어 보고 싶습니다. 설사 지금 당장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느리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 보겠습니다. 적어도 조금씩은 변하지 않을까요?


   정원 스님, 


   아무도 스님을 기억하지 않는 것 같은 밤에 스님이 외로우실까봐 편지를 써 봅니다. 


   저는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려서 이 편지를 공개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스님이 너무 고독하지 않으시게 용기를 내보렵니다. 


   스님, 부디 평안하십시오.


   나는 안심이 되었다. 더 이상 그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제 그녀의 블로그를 즐겨찾기에서 삭제해야겠다.
 
1월 19일 200자×70매 일곱째별


 


 

* 제7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작. 작가들 60호(2017년 봄호)에 게재된 원고 재수록함.

 

 

 

 

 

작성일 : 2018.04.17
저자 소개  

일곱째별
다큐멘터리·르포작가.
웹진 <문화 다> 편집동인. 제7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 (르포 부문) diesiebtenstern@gmail.com
[댓글]
⊙ 이름
⊙ 비밀번호
⊙ 이메일
댓글 남기기
비판적 문화 공동체 웹진 [문화 다]   |   www.munhwada.net(또는 com)
문화다북스 대표 강소현   |   웹진 <문화 다> 편집인 최강민, 편집주간 이성혁   |   사업자번호 271-91-00333
[웹진 문화다 / 문화다북스] 연락처 : 02-6335-0905   |   이메일 : munhwada@naver.com
Copyright ⓒ 2012 Webzine Munhwad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