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본 기사[종합]
별점 평가
★★★★★★★★☆☆
★★★★★★★★★☆
★★★★★★★★☆☆
★★★★★★★★☆☆
★★★★★★★★☆☆
★★★★★★★★★★
★★★★★★★★★☆
위치 : HOME > 문학 > 문학판
[이성혁의 아방가르드 주점]  시는 시 자신을 위해서라도 세상을 바꾸고자 해야 한다 (2)


이성혁(문학평론가)





3

 

   미래파는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기보다는 제도화된 서정시의 표현 형식을 바꾸고자 했다. 미래파가 등장한 2000년대 전반은 신자유주의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시기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상대적으로 더 민주적인 정부가 1990년대 말부터 10년 동안 들어섰던 것이 그러한 자유로운 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기여가 컸다. 하지만 사회에 뿌리를 내린 신자유주의 권력은 이명박 정부의 출범으로 정치권력까지 잡게 되었고, 그야말로 살벌한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에 수립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이 정부부터는, 어느 정도 정착되었던 민주적으로 운용되던 제도를 파괴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형성되었던 민주적인 분위기를 국정원 등 국가기관을 통해 파괴했으며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방송과 언론을 포함한 문화계 전반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려고 했다. 인터넷의 악성댓글을 통해 저질 여론을 형성하여 대중의 토론에 기초하는 민주주의의 바탕을 허물어버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봉기가 일어났으며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급기야는, 박근혜 정권에 이르러 304명이 사망, 실종된 세월호 참사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는 그간 신자유주의 논리에 장악된 한국사회가 어떻게 반생명적인 폐허가 되었는지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의 전반적인 퇴행과 소위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헬조선’의 도래, 그리고 이에 대한 광범위하고 처절한 저항은 한국시의 현재에 대해 다시 묻게 되는 상황을 가져왔다. 과연 ‘미래파’에까지 도달한 한국시는 정말 한국 사회에서 전위적인 위치에 있는가? 전위, 아방가르드란 가장 앞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새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920년대의 다다나 초현실주의나 러시아의 구축주의, 1960년대의 상황주의자들이나 플럭서스는 사회의 맨 앞에 있었다. 1970년대 군사독재체제에서 한국작가들의 자유실천위원회도 사회의 맨 앞에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의 승리와 이에 대한 다중의 저항 속에서 한국시의 모습은 왜소해 보이지 않았던가. 물론 한국의 시인, 작가들은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소속 시인들, 리얼리스트 100의 시인들뿐만 아니라 작가 조직과는 무관한 젊은 시인들도 ‘69선언’이나 ‘304 낭독회’에 참여하여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대한 저항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다중이 더 앞에 있고 시단은 대중의 방어막 뒤에서 저항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은 나뿐일까. 

 

   이런 생각과 함께, 새로운 지배체제가 사회에 스며들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2000년대 한국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는 이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무시해왔던 것 아닐까, 그리하여 다중은 앞에 있는데 시단은 그 뒤에서 서정파니 미래파니 논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시는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다중으로부터 외면되어 소수의 매니아 층들에 의존하는 형국에 떨어져버린 것은 아닐까. 이러한 평가는 지나치게 자학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좀 더 명확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시가 한국사회와 문화의 전위가 아니라 후위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느낌은 2016년에서 2017년에 걸친 ‘촛불혁명’ 국면에서도 갖게 되었다. 물론 시인들은 열심히 촛불혁명에 참여했고 다른 예술인들과 함께 ‘블랙리스트’ 통제에 항의하는 행동을 가졌으며 이 촛불혁명과 항의를 위한 시 모음집들도 발간했다. 시인들의 이러한 직접행동에의 참가에 대해 고무적이고 높이 평가하지만, 전 대통령이 탄핵-구속되고 촛불혁명의 뜻을 받아 안겠다는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서 촛불혁명 국면이 어느 정도 사그라진 현재, 다시 “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다소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시가 꼭 세상을 바꿀 수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 아니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시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그 안에 품고 있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시만이 가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이 어떤 사유의 영역을 넓힌다든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시의 무능력이 시의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는 없다고 본다. 시의 정치성을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는 비정치성에서 찾는 견해도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시를 쓰면서 대중의 저항과 함께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비시적으로 몰고 마는 효과를 가진다. 시인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자신의 삶에 따라서 세계와 마주하고 시의 장을 구축한다. 시인이 더욱 자신의 장을 확장하다보면 유형무형의 세상의 권력과 마주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 권력과 싸우면서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시민으로서만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행하는 노력, 즉 시를 통해 세상과 싸우는 노력이다. 

 

   어떤 이는 시민으로서 저항할 수는 있지만 시를 통해 저항하려고 하면 목적에 시가 종속되어 시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계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를 통한 싸움은 시인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은 날카로운 인식과 풍부한 상상력이 요구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목적에 맞추어 시를 양산하려고 한다면 좋은 시가 나올 리 만무하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많은 ‘좋은 시’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자신의 존재를 건 시인으로부터 나왔다. 한국의 김수영이나 김지하, 김남주뿐만 아니라 외국의 네루다, 브레히트, 마야코프스키 그리고 초현실주의를 포함한 많은 아방가르드 시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 낭만주의의 후예이기도 하다. 특히 20세기 대표적인 아방가르드이자 최고의 예술적 성과를 낸 초현실주의는, 옥타비오 파스가 말했듯이, 낭만주의의 그러한 측면을 이어받아 삶을 바꾸고자 하는 랭보와 세계를 변혁하자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결합하고자 하지 않았던가. 즉 적어도 20세기에는 시와 예술을 통해 이 비참의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시인의 열정을 통해 많은 위대한 시가 창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바꾸는 일과 시는 대척적이지 않다. 도리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욕은, 낭만주의 운동과 초현실주의 운동이 보여주듯이 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두 예술 운동은 개인의 삶을 바꾸는 것, 개인의 감성과 의식을 시를 통해 변화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강조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이 전제되어야 세상을 바꾸는 시를 비로소 쓸 수 있을 것이기도 하다. 시를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근대 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된 시의 최대한의 의욕이자 비전이다. 이 비전을 구태여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저항 운동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권력은 더욱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모순과 권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근대시의 비전을 포기할 때, 시는 왜소화되고 제도에 갇혀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시는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와 다중의 창의적인 저항 행동의 후위에 머물고 말 것이다. 시는 사회와 대중의 외면 속에 보호구역에서 생존하고 말 것이며, 더욱 문제인 것은 시인은 그 보호구역 속에서 자족하면서 우리는 대중과 다르다는 나르시시즘에 빠져들 것이라는 점이다.




    

촛불untitled.png


                                        4

 

   “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기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한국시가 근대시가 가졌던 비전을 회복하여 저항 국면뿐만 아니라 평소의 국면에서도 시 쓰기를 통해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찾고 그 가능성을 제시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하여, 최근 읽은 책의 일절을 소개하고 한두 마디 말을 덧붙이면서 글을 끝내고자 한다. 

 

   시가 세상을 바꾼다면, 시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는 대답에는 “그러한 힘이 시의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이 다시 따라올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한다는 일은 무척 어렵다. 이 답을 찾는데 도움을 얻으려고 서경식의 󰡔시의 힘󰡕(서은혜 옮김, 현암사, 2015)을 읽었다. 이 책에서 그는, 루쉰의 말에서 “어디까지나 나아가자,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우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라는,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의 독후감의 일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나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110-111쪽)

 

시인은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을 노래할 방법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물론 옛날과 같은 가락으로 같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이 상황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노래해야만 한다. 그것이 시인의 소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도 똑같다. 시대가 편하고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155쪽) 

 

   위의 구절들은 깊이 숙고하게 만든다. 서경식의 논의를 따라가 본다. 시의 힘은 사람의 마음-정동-을 움직이는 힘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그것은 시인이 소수자의 편에 섰을 때, 나아가 자신이 소수자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것은 승산 유무를 계산하지 않는 선택이다. 권력을 가진 다수자의 입장에 서서 시를 쓰는 것은 결국 왕을 칭송하던 궁정시인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한 권력에 빌붙는 시는 문학적으로도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긴장감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소수자 되기는 “언제나 패”하게 될 자의 입장에서 권력과 싸우는 길을 가는 것이기에, 그의 시 쓰기는 팽팽한 긴장 속에 이루어지면서 깊은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렇게 쓰여진 시는 역시 소수자일 패자에게 힘을 주며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시의 힘에 대한 이러한 사유가 낡았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 지겨운 참여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새로운 가치는 무엇이며 그 가치는 정말 새로운 것인지, 그리고 그 새로운 가치가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질문하고 싶어진다. 새롭다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상품의 새로움이 아니라면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이며, 상품의 새로움이란 결국 역설적으로 동일한 것의 반복-‘새로움의 동일성’-에 불과하다.(이에 대해서는 발터 벤야민과 같은 사상가가 이미 논한 바 있다.) 시의 새로움은 저 상품의 새로움과의 결투 속에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어서, 시가 자본주의의 새로움의 논리에 휩쓸려 들어갈 때에는 이미 그 시는 낭만주의에서 시작된 미적 근대성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의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일이 이러한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변할 수 없는 ‘시-문학’의 터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고통과 소외, 상처의 형태는 다양하고 그 방식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시-문학’의 터전 역시 동일한 상황으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시-문학’의 터전도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소수자들의 고통과 소외, 상처가 시-문학이 거주할 장소임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터전에서 시인은 자신의 삶을 나름대로 살고, 시를 통해 그 자신의 삶을 나름대로 변화시키며, 나아가 사람들에게 작용하면서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시의 힘을 확보하여 그 힘을 통해 소수자들에게 고통과 소외, 상처를 주는 세상을 바꾸고자 할 수 있다. 이것이 ‘소수자-되기’를 행하고자 하는 시인의 삶이자 시작(詩作)일 것이다. 

 

   소수자 각 개인의 삶은 척도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다수자보다 더욱 다채롭고 개성적일 수 있다. 척도에 따라 살아가는 다수자의 삶은 각자 다를 것 같지만 도리어 획일적이다. 소수자야말로 차이를 생성하는 삶을 살 가능성을 가진다. 그렇기에 ‘소수자-되기’를 감행하는 시인들은 척도를 따르는 다수자에 편입한 시인보다 더 다채로운 시를 쓸 수 있다. 시의 새로움은 비로소 여기에서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은 상품의 새로움에, 즉 ‘새로움의 동일성’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다. 시인은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면서 시의 새로움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시의 터전인 소수자의 고통과 소외와 상처 속에 거주해야 하며, 그 소수자로서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나아가 소수자의 고통과 소외와 상처를 만들어내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을 서경식의 글은 암시해준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시를 쓴다는 일은 새로운 시를 창출하기 위한 일이기도 한 것, 이는 시는 시 자신을 위해서라도 세상을 바꾸려고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지금 존재하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도래할 가능성을 현실화한다는 의미다.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시적인 능력 아니겠는가.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것, 그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시적인 능력의 발휘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시인은 그러한 시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시를 쓰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과 세상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할 수 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시는 이러한 시적 능력을 더욱 활성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은 고통 받는 소수자의 삶 속에 있을 때 발동될 수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위해서라도 소수자의 삶에 자신의 자리를 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소수자의 삶으로부터 시인은 다른 삶과 세상을 욕망하게 될 것이며, 그래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시적 능력을 더욱 활발히 개진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하여, 서경식의 말을 다시 빌리면, 아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았으며, 지금 이 시대는 여전히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소수자-되기’를 감행하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시인들의 시가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형성해나갈 때, 이때의 시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정치는 그러한 시적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화요문학> 2017년 제21호에 실린 필자의 글 「시는 시 자신을 위해서라도 세상을 바꾸고자 해야 한다」를 수정한 것입니다. 




 

작성일 : 2018.01.09
저자 소개  

이성혁
1967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문화 다》 편집주간.
1999년 《문학과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2003년 《대한매일신문》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으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 redland21@hanmail.net
[댓글]
⊙ 이름
⊙ 비밀번호
⊙ 이메일
댓글 남기기
비판적 문화 공동체 웹진 [문화 다]   |   www.munhwada.net(또는 com)
문화다북스 대표 강소현   |   웹진 <문화 다> 편집인 최강민, 편집주간 이성혁   |   사업자번호 271-91-00333
[웹진 문화다 / 문화다북스] 연락처 : 02-6335-0905   |   이메일 : munhwada@naver.com
Copyright ⓒ 2012 Webzine Munhwada. All rights reserved.